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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토론할 수 있는 사회인가 [전쟁과 문학]

지금 대한민국은 토론할 수 있는 사회인가 [전쟁과 문학]

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8편 사회가 합의하는 법
귄터 그라스 「게걸음으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
피란길 나선 독일인 다수 사망
가해국 독일 추모 제대로 못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
구스틀로프호 비극 소설로 다뤄
네오나치 메시지 동조했단 의혹
귄터 "상처 받으면 고통 호소해야"
각계각층 갑론을박 벌이고 합의
1945년, 1만명의 독일인이 소련의 잠수함 공격으로 나치 간부의 이름을 딴 구스틀로프호號에서 사망한다. 「양철북」으로 나치즘을 비판했던 작가 귄터 그라스는 구스틀로프호 사건을 바탕으로 「게걸음으로」를 썼다. 그가 '네오나치'를 옹호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독일 사회에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합의점을 찾아갔다. 골목에서 벌어진 참사를 두고도 '합의점'을 못 찾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터 그라스의 책 한권으로 독일에선 나치를 둘러싼 수많은 토론이 벌어졌다.[사진=뉴시스]


1945년 1월 소련군 공세에 밀린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했다. 소련군은 점령 지역에서 가혹한 보복행위를 일삼았다. 겁에 질린 독일 민간인들은 피란길에 올랐다. 그 숫자는 1000만명에 달했다. 

독일군은 동프로이센 지역에 고립된 병력과 피란민을 구하고자 민간선박까지 총동원했다. 1945년 1월 30일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號'는 피란민과 부상병을 가득 싣고 출항했다. 배 이름은 스위스에서 나치의 하부조직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유대인 청년에게 암살당한 나치의 당 간부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구스틀로프호는 항해 도중 소련군 잠수함에 포착됐다. 3기의 어뢰에 맞은 구스틀로프호는 순식간에 침몰했고, 1만여명의 탑승자가 사망했다. 그중 절반이 5세 이하의 아동이었다. 구스틀로프호의 침몰은 1912년 빙산과 충돌해 1500여명이 사망한 타이타닉 사고를 능가하는 최악의 해양참사로 기록됐다. 그러나 이 참사는 조용히 묻혔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외부에 호소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구스틀로프호 비극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한 소설이 출간한 후였다.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1927~2015년)는 노벨상 수상 이후 첫 소설인 「게걸음으로(2002년)」를 발표했다. "왜 이제야"라는 말과 함께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독백으로 끝난다. 

이 소설에는 3대에 걸친 어느 가족이 등장한다. '툴라'는 1945년 구스틀로프호에서 살아남은 여성이다. 만삭이던 그녀는 다른 배로 옮겨 타서 가까스로 출산에 성공했다. 17살 소녀였던 툴라는 구스틀로프호 악몽에 평생 시달렸다. 그녀의 머리칼은 10대에 백발로 변했다.

수천명이 익사하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툴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그녀는 공산주의 국가 동독에서 스탈린의 이념을 충실하게 수용하면서도 나치의 상징적인 인물 '구스틀로프'를 존경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어머니에게 구스틀로프 참사를 수없이 들으면서 성장한 툴라의 아들 '파울'은 신문기자다. 1945년생인 파울은 독일이 저지른 범죄를 철저하게 교육받고 자랐기에 어머니의 슬픔에 동조하지 않는다. 파울은 우익신문 '슈프링어'에 근무하다가 좌익 성향의 신문 '타츠'에도 근무하는 등 중립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정치적으로 가능한 한 옳은 편에 서려고 노력하면서 거짓을 쓰지 않고 정확하게 기사를 작성하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기자다. 툴라는 자신이 겪은 비극을 알면서도 독일의 전범 행위를 더 중시하는 아들에게 실망한다. 

반면 파울의 아들 '콘라트'는 할머니 툴라의 슬픔과 분노에 완전히 동조한다. 콘라트는 인터넷으로 구스틀로프호 참사의 정보를 얻고, '슈베린 동지회'라는 모임에 가입한다. 콘라트는 순교한 나치 간부 이름을 딴 배가 침몰한 사건을 외면하는 독일 정부에 분노한다. 그는 할머니처럼 소련군의 공격을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살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는 독일이 일으킨 전쟁범죄를 부정하면서 극우파가 된다. 당시 독일 극우 청년들은 인터넷상에서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이 돼 가상의 논쟁을 벌이는 '역할놀이'를 즐겼다. 역할놀이에서 나치당 간부 구스틀로프 역할을 맡은 콘라트는 구스틀로프를 암살한 유대인 청년 '다비드 프랑크푸르터' 역할을 맡은 사람과 논쟁을 하다가 증오에 휩싸인다.

결국 콘라트는 '슈트렘플린'이라는 청년을 살해한다. 콘라트는 법정에서 독일인을 죽인 유대인을 향한 분노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소설이 출간하자 독일 극우세력이 귄터 그라스의 지지를 선언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귄터 그라스는 대표작 「양철북(1958년)」에서 나치즘을 비판했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귄터 그라스는 TV토론에 출연해 자신의 소설에는 네오나치(Neo-Nazi)의 주장에 동조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다고 항변하면서 상처받은 자는 누구나 고통을 호소하고 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귄터 그라스는 그동안 독일인들이 과거의 잘못에 지나친 죄의식에 시달렸으며 그 결과 젊은 세대가 역사의 상처를 부정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토론을 거치면서 과거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이 재조명됐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토론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와 기억을 다룬 소설을 읽고서 모든 세대가 토론하는 일은 가능할까. 가라앉은 배, 조부모 세대와 비슷한 정치관을 지닌 청년들, 좁은 골목에서 벌어진 참사, 이를 정치적 계산으로 애도를 관리하는 정부…. 귄터 그라스의 소설과 독일의 논쟁은 우리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2015년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난민을 수용했다. 「게걸음으로」를 둘러싼 논쟁이 그의 결단을 이끌었다. [사진=뉴시스]


2015년 9월 2일, 내전 중인 시리아를 탈출하다가 터키 해안에서 사망한 세살 아이(아이란 쿠르디)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자 전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난민들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이때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먼저 나섰다. 독일 정부는 100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극우주의자들의 반대 시위에도 메르켈 총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란 쿠르디의 사진을 보며 다수의 독일인은 구스틀로프호 침몰로 죽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2002년 「게걸음으로」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메르켈 총리의 결단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귄터 그라스는 독일인들의 아름다운 결단을 보지 못하고 2015년 4월 13일에 사망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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